정당의 당 롤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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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연합당 롤모델
1) 해외 사례 : 아브라함 카이퍼
(1) 목회자로서의 사역
1> 초기 사역과 회심
아브라함 카이퍼는 1862년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교(Leiden University)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목회자로 안수받았습니다. 초기에는 자유주의 신학, 즉 이성을 강조하고 성경의 권위를 상대화하는 당시 유럽 신학의 흐름에 깊이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회 사역 초기, 한 시골 교회의 평범한 여성 신자와의 만남을 계기로 회심하게 됩니다.
이 여성은 단순하고 깊은 믿음으로 성경을 대하며 “목사님, 예수님을 살아 있는 분으로 믿고 계신가요?”라는 질문을 던졌고, 이는 카이퍼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교리나 학문적 신학이 아닌 ‘살아 있는 믿음’이 본질임을 깨닫고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앙으로 전향하게 됩니다.
2> 강단 사역과 말씀 중심의 목회
회심 이후 카이퍼는 설교자로서 깊은 변화를 겪습니다. 그는 단지 신학적 지식 전달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삶의 변화와 공적 책임을 강조하는 설교를 지속합니다.
그의 설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집니다:
1- 성경의 절대 권위 회복
- 성경은 단순한 종교 문서가 아니라, 모든 영역에 영향을 주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임을 선언.
2- 예배를 넘어선 삶의 실천 강조
- 그는 설교를 통해 신자들이 사회 정의, 교육, 노동, 정치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책임이 있다고 가르침.
3- 일상의 성화 강조
- 카이퍼는 거룩함이 교회 안에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직장, 학교, 정치 등 일상 모든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강조.
그의 설교는 지식인이 아닌 평범한 신자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고, 사회 참여와 윤리적 책임을 고무하는 예언자적 메시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3> 교회를 ‘공공 신앙의 기반’으로 이해
카이퍼는 교회를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영적 쉼터’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신앙인의 사회 참여를 훈련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기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교회를 통해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공적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1- 정치 참여
- 신앙인은 공적 정책과 제도에도 책임이 있으며, 교회는 이를 위한 ‘양심과 진리의 등대’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음.
2- 사회 구조의 개혁 주체
- 교회는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며, 동시에 사회의 윤리 기준을 형성해야 한다고 보았음.
3- 지성과 신앙의 통합
- 교회는 신앙과 학문, 노동과 경제, 예술과 문화를 가로지르는 세계관 교육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음.
4> 실제 목회 사례
베스터게스트 교회 목회 (Beesd 및 Utrecht 등): 카이퍼는 여러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섬기며 신앙 공동체의 변화뿐 아니라 지역 사회와 교육 개혁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성경 공부와 신앙 훈련을 단지 개인 경건의 도구로 보지 않고, 사회 정의와 정치 개혁을 위한 공동체적 훈련의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그가 섬긴 교회는 단지 예배당이 아니라 기독교 사회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나중에 반혁명당(Anti-Revolutionary Party) 창당 및 기독교 대학 설립 등에도 교회 멤버들이 주요 역할을 하게 됩니다.
5> “하나님의 주권”을 목회에 구현
카이퍼의 신학과 목회 사역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Soevereiniteit van God)”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 선언하지 않으시는 단 하나의 평인치 영역도 존재하지 않는다.”
(There is not a square inch in the whole domain of our human existence over which Christ, who is Sovereign over all, does not cry: ‘Mine!’)
이 선언은 그가 교회 강단에서부터 국회 단상까지, 신학교에서부터 언론사까지, 가정에서부터 국가까지 모두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세우고자 했음을 보여줍니다.
(2) 언론 활동과 사상의 전파
아브라함 카이퍼는 1872년, 네덜란드 최초의 정통 개혁주의 일간지 《De Standaard》(더 스탠다르드)를 창간합니다.
그는 이 언론을 단순히 교회 소식이나 신학적 논문을 싣는 매체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공공 영역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실천하고 담론을 형성하는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1> 기독 언론의 목적
1- 공적 의견 형성의 도구
카이퍼는 언론을 통해 신앙의 언어가 사회적 담론에서 배제되지 않고 ‘공공의 대화’로 작동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현대 언론이 객관성이나 중립만을 강조하면서 종교를 사적 영역으로 밀어넣는 경향과 대조됩니다.
2- 정치·문화·사회 비평
De Standaard는 당시 자유주의적 세속 담론과 급진적 사회주의 사조에 대응하여, 개혁주의적 시각에서 시대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3- 복음주의와 정치 철학의 연결
그는 복음을 ‘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게 하고, 정치철학, 교육이념, 문화운동과 접목시켜 사회 개혁의 동력으로 확장했습니다.
2> 언론인의 역할과 영향
카이퍼는 단순히 발행인이나 편집자에 그치지 않고, 매일 글을 쓰며 여론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사설과 기명 칼럼을 통해 세속적 사고를 비판하고, 대안적 기독 세계관을 제시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목회자와 학자, 정치인, 언론인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며, ‘기독교 사회 참여 모델’을 일상적 언어로 구현했습니다.
De Standaard는 이후 반혁명당(ARP)의 정치 이념을 확산시키는 플랫폼이 되었고, 신앙과 공공성의 통합이라는 카이퍼의 비전을 대중적으로 구현하는 중요한 창구가 됩니다.
(3) 교육운동 – 자유대학교 설립 (Vrije Universiteit Amsterdam)
아브라함 카이퍼는 1880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 Amsterdam)를 설립합니다. 그는 이 학교를 통해 ‘기독교적 학문과 교육’의 자립 기반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1> 창립 목적
당시 네덜란드의 국립 대학들은 세속주의 기반의 자유주의적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카이퍼는 이에 반대하여, 신앙적 원리와 철학을 기반으로 학문을 구축하는 대학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국가와 교회의 통제를 받지 않는, ‘신앙과 학문의 자율성을 모두 보장하는’ 고등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2> 기독교 세계관과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
자유대학교의 핵심 철학은 바로 카이퍼가 제시한 “영역 주권(Sfeer Soevereiniteit)”입니다. 이 개념은 하나님이 각 영역(정치, 교육, 예술, 과학, 가정 등)에 고유한 주권과 질서를 부여하셨다는 신념에 기반합니다.
따라서 정치권력이 교육을 통제하거나, 교회가 과학을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각 영역은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 책임을 갖고 조화롭게 협력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3> 학문과 신앙의 통합
카이퍼는 신학뿐 아니라 법학, 철학, 경제학, 문학, 정치학 등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기반한 연구가 가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단지 종교적 훈련이 아닌, 세상을 보는 방식 자체를 ‘기독교적 사고틀’로 구성하도록 훈련시켰습니다.
4> 실제 운영과 유산
카이퍼는 자유대학교의 초대 총장을 역임하며, 직접 교육 과정을 구성하고 강의도 진행했습니다.
이 대학은 단기간에 개혁주의 지성인들을 양성하는 핵심 기관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네덜란드와 유럽 개신교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자유대학교는 그 후 전 세계 개혁주의 기독교 대학 설립 운동의 모델이 되었으며, ‘신앙-학문 통합 교육’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힙니다.
(4) 정치 활동과 총리 재임
아브라함 카이퍼는 1874년 네덜란드 의회에 입성하며 정식으로 정치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반혁명당(Anti-Revolutionary Party, ARP)을 창당하고 당수로 활동하였으며, 1901년부터 1905년까지 네덜란드 총리직을 역임합니다. 그의 총리 시절은 신앙과 정치의 통합 모델을 실질적으로 구현한 시기였습니다.
1> 교육 균등법(School Funding Equality)
당시 네덜란드는 국립학교에만 국가 지원이 집중되던 시기였으며, 신앙 기반 사립학교는 차별을 받아왔습니다.
카이퍼는 신앙을 기반으로 한 사립학교에도 국립학교와 동일한 국가 재정지원을 가능하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교육의 자유와 종교적 자율성을 동시에 보장하려는 의도로, 네덜란드 사회에 교육적 다원주의를 정착시키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2> 사회복지 정책 개혁
카이퍼는 노동자 보호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했습니다. 당시 산업화로 인해 심화된 빈곤과 노동 착취 문제에 대응해 노동시간 제한, 아동노동 금지, 실업 보호 제도 등의 복지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칼뱅주의적 ‘소명관’에 따라, 노동자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신념에 기반한 정책이었습니다.
3> 기독교 정당의 운영 모델
카이퍼는 신앙이 단순한 개인 윤리를 넘어, 정당 운영과 정책 결정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세속 정당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며, 협력과 원칙 중심의 정치를 동시에 지향했습니다.
그는 정당을 이념 실현의 도구이자, 시민 공동선을 위한 기독 신앙의 플랫폼으로 기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5) 영역주권(Sphere Sovereignty) 이론
카이퍼의 가장 핵심적인 정치철학은 영역주권(Souvereiniteit in eigen kring) 개념입니다. 이 이론은 사회 각 영역(가정, 교회, 학교, 국가, 학문, 예술 등)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위임받은 독립성과 책임을 갖는 자율적인 공동체라는 사상입니다.
1> 기본 원리
국가는 교회의 일을 간섭하지 말아야 하며, 교회는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각 영역은 서로 침범하지 않되, 하나님 아래 질서 있게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이는 전체주의나 무정부주의 모두를 경계하는 구조입니다.
2> 현대 적용 가능성
이 이론은 다원주의 민주주의, 시민사회, NGO, 종교자유, 학문자유 등의 철학적 기반으로 확장됩니다.
오늘날에도 정치와 종교의 건전한 협력 모델, 교회와 국가의 균형 원리, 정책 다원주의의 기초 이론으로 인용됩니다.
(6) 공공신학의 선구자
아브라함 카이퍼는 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개인의 신앙을 공공 영역에 적용한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우리 인간 존재의 전 영역 중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 선언하지 않는 단 하나의 평인치도 없다.”
(There is not a square inch in the whole domain of our human existence over which Christ, who is Sovereign over all, does not cry: ‘Mine!’)
1> 핵심 의미
신앙은 단지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법률·교육·경제·문화 등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이는 신앙과 공적 삶의 통합을 추구하며, ‘신앙은 사적’이라는 근대 세속주의를 비판하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2> 영향
카이퍼의 공공신학은 이후 기독 NGO 운동, 기독 정당, 개혁신학계 교육 기관, 시민사회 운동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 캐나다의 트리니티 웨스턴 대학교, 한국의 고신·합신 계열 신학 교육기관에도 직간접적으로 그 사상이 수입되었습니다.
2) 국내 사례 : 독립운동 조직
1) 역사적인 독립운동
(1) 독립운동에 있어 종교의 결정적 역할과 오늘날의 혼란
3·1운동을 비롯한 한국의 독립운동은 단순한 정치 투쟁이 아니라 도덕과 신념, 그리고 양심의 발현이었던 신앙적 실천 운동이었습니다. 이 중심에는 정식 종교인들의 헌신과 윤리적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종교별 분포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인(개신교, 천주교): 16명
천도교인: 15명
불교인: 2명
이는 단순한 종교 참여를 넘어, 3대 종교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연합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전국 311개 지역 중 기독교 주도 지역 78곳, 천도교 주도 66곳, 양교 협력 지역 42곳은 당시 종교가 지역 사회 변화의 실질적 구심점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당시 국민 전체 중 1.3~1.5%에 불과했던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참여율은 숫자 이상의 도덕적 책임과 사회적 헌신을 나타내며, 종교가 독립운동의 정신적 주춧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정식 종교의 윤리적 감시 기능은 약화되고, 종교가 정치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잘못된 이해가 확산되면서 오히려 정통 종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정치에 종교가 들어가면 안 된다”는 원래 의미는 국가가 종교를 지배하거나, 종교가 권력화되지 말라는 경계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정식 종교인의 양심적 발언조차 억제하며, 사회 전체에서 종교의 윤리적 역할을 봉쇄하려는 태도로 왜곡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일부 무신론자 혹은 반종교 사상을 지닌 세력들이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종교인들과 철학적 기반 자체를 부정하거나 왜곡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 세력으로 활동하면서 종교인들을 박해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데 앞장섰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정통 종교를 “비과학적”, “비이성적”이라고 폄하하며, 종교가 이끄는 민족운동을 거슬렀습니다. 특히 3·1운동 당시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이 투옥되고 순교한 데 비해, 일부 무신론적 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은 일본의 근대성에 동조하거나, 그 체제를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잘못 해석한 형태로 수입하여, 정통 종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라며 적대시했으며, 인간 해방을 말하면서도 실상은 전체주의적 권력 구조와 사상 통제에 동참하게 됩니다. 종교는 억압받고 배척되었고, 그 대신 이념 중심의 새로운 ‘종교 없는 종교’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왜곡은 단지 종교를 배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윤리 감시와 공동체 회복이라는 핵심 기능마저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 사회는 도덕적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이념의 이기주의와 감정의 분열 속에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신론 그 자체를 하나의 철학적 입장으로 존중할 수는 있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타인의 신념을 억압하고, 역사적으로 민족운동을 주도했던 종교 세력을 탄압하거나 폄하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때입니다. 특히 일부 세력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조롱하거나 배척했던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에는 오히려 ‘진보’ 혹은 ‘민주’라는 이름으로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념과 종교의 균형, 그리고 신앙과 시민의 윤리 사이의 조화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종교는 억압의 수단이 아닌, 공동체를 살리는 감찰의 힘이며, 과거 독립운동에서 보여준 것처럼 정치와 사회를 이끄는 도덕적 나침반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 없는 정의, 윤리 없는 이념은 결국 새로운 폭력과 억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오용된 명제로 종교의 도덕성을 배척하고, 인간의 권리를 말하면서도 실상은 권력을 위한 억압의 수단으로 종교를 말살하려 했던 역사가 있었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왜곡된 무신사상은 자유가 아닌 전체주의를 강화시켰고, 인간 존엄보다 이념 우위를 강조하며 공동체를 분열로 몰아넣었습니다.
오늘날 사이비, 이단, 반종교적 세력들이 정치와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은, 바로 정통 종교와 윤리적 감시자의 부재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각 정식 종교 교단과 종파에 소속된 진정성 있는 종교인들의 발언과 감찰 기능을 복원해야 합니다. 정치를 감찰하는 윤리적 나침반으로서의 종교, 그것이야말로 3·1운동의 정신이며, 오늘날 사회의 분열과 혼란을 막는 길입니다.
(2) 과거 독립운동의 구조
- 삼삼제 조직: 3인이 1조, 3조가 1구, 3구가 1단 형태로 운영되며, 은밀성과 책임 구조를 동시에 갖춤.
- 교통국(행정)–군사국(실천)–학무국(교육): 기능 분화.
- 상하 연계형 민중조직: 상층 지도부는 전략을, 하층은 지역 기반 실천과 동원을 담당.
- 의열단 / 신흥무관학교 / 대한민국임시정부: 실천과 지휘가 이원화된 분리 구조.